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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유은선의 문화칼럼> 지수당(地水堂)의 의미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 등록일

    2020.08.05

  • 조회수

    151

  • 시설종류

    기타

  • 카테고리

    기타

유은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졸업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전) 국악방송 본부장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조선시대 국가의 보장처(保障處,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 역할을 하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남한산성은 지금으로부터 425년 전인 1595년(선조 28년)에 축조되었는데, 아직도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어서 이곳에 가면 역사 속으로 여행을 하게 되어 찬찬히 살펴보게 된다.

현절사(顯節祠)앞에서 잠시 나라와 나에 대한 생각을 하고 내려와 왼쪽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운치 있는 정자(亭子)가 하나 보인다. 이름은 지수당(地水堂).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산 속에서 만나는 연못은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것도 산성 안에서 라니 막상 지수당을 만나고 나니 막히지도 않았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정자라고 하기엔 제법 큰 편이다. 사방 둘레에 연못이 있어 운치는 참 좋다. 그만큼 지수당의 풍경이 주는 편안함이 컸던 것이다.

지수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뒤로는 세 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하나는 매몰되어 논이 되었고, 지금은 두 개의 연못만 남아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3개의 연못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더 운치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연못 가운데에는 관어정(觀漁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빈 터만 남아 있다.

그런데 남한산성은 1636년에 이미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혹독한 상처를 남긴 곳인데 이런 곳에 연못을 누가 왜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수당은 광주(廣州) 부윤(府尹, 조선시대 지방관청인 부의 우두머리)이었던 이세화((李世華: 1630∼1701)가 1672년에 지었다고 한다. 이세화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숙종 15년(1689)에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이 이에 진노해서 이세화를 귀양을 보냈는데 귀양하던 중 유배가 풀리고 이후 공조·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친 그야말로 출중한 인물이었다.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약천집(藥泉集)’에는 “이세화는 노년에 이르러 조정에서 좋은 지위와 사랑스러운 말, 때로는 엄격한 명령으로 끊임없이 불렀으나 그것을 끝까지 거절한 고고한 인품으로 저 멀리 천 길 위의 창공을 나는 봉황에라도 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칭찬할 만큼 선정을 베푼 청백리였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만 보더라도 이세화라는 인물은 강직하고 나라를 위해서라면 임금께 직언도 서슴지 않았던 충신 중의 충신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런 이세화는 왜 남한산성에 이런 연못을 만들었을까? 실제 고관대작들과 낚시를 즐기기 위해서 이런 정자와 연못을 만들었을까?

지수당의 이름에서 ‘지수(地水)’란 주역(周易)에 나오는 ‘지중유수사(地中有水師)니 군자이용민축중(君子以容民畜衆)하나니라’ 대목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說)이 있다. ‘땅 가운데 물이 있는 것이 사괘(師卦)이니 군자가 보고서 백성을 용납하고 무리를 기른다’는 뜻으로, 물이 땅속에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땅 속에 스며있는 물로 산천초목이 잘 자랄 수 있듯이 평소에 군사를 잘 길러서 위난(危難)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또한 물이 귀한 산성 안에 풍수적 의미를 둔 것 일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이미 병자호란을 겪었던 조선의 안녕을 기원했던 광주부윤(廣州府尹) 이세화로서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생각하며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그냥 한가롭게 취미생활을 하고자 했음이 아닌, 이 역시 나라를 생각하며 신의(信義)를 다지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고자 지수당을 지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지수당 동쪽에 있는 이세화 공덕비를 바라보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걱정하는 방법은 개인마다, 상황마다 참 많이 다르다. 누군가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강조를 하고 큰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또 그 누군가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걱정되는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지수당은 우리에게 지금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 그 다음을 생각하게 하는 이 시대의 시금석(試金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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